어찌된 일인지 그 흔한 유럽여행을 한번 못 가봤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대학동창 한 친구는 스위스에서 아내와 찍은 사진을 카톡방에 올리고 있는데 말이다. 아내나, 아들, 딸도 유럽 여행 가고 싶단 얘기 한 번 없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가족여행의 성지인 유럽을 아직도 안 가보고 중년을 맞이하고 있는 신세다.
유럽도시기행 2편이 나왔다는 소개를 우연챦게 봤다. 내친김에 1편을 읽어보기로 한다.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 파리.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한 곳을 꼽으라면 나는 이스탄불을 꼽겠다. 유작가의 시선으로, 그리고 유작가의 손으로 적어내린 글들을 보며 나도 언젠가는 이런 여행을 통해 나름대로의 여행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관광 안내서, 여행 에세이, 도시의 역사와 건축물에 대한 보고서, 인문학 기행, 그 무엇도 아니면서 조금씩은 그 모두이기도 한 이 책은 도시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라고 한 유작가님의 고백을 나도 언젠가는 하게 될 것 같다.
특히, 나는 호텔을 좋아한다. 3박4일 짜리 휴양지 섬 가족여행을 가도 으레 우리 가족들은 아빠가 매일 호텔을 옮길 걸 예상한다. 호기심. 무언가 색다른 경험. 나는 편안함 보다는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나선다. 언젠가는 그 얘기를 해 보고 싶다.
<책 서문>
그러려면 도시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건축물과 박물관, 미술관, 길과 공원, 도시의 모든 것은 ‘텍스트(text)’일 뿐이다. 모든 텍스트가 그러하듯 도시의 텍스트도 해석을 요구하는데, 그 요구에 응답하려면 ‘콘텍스트(context)’를 파악해야 한다. 콘텍스트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말한다. 도시의 건축물과 공간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 그들이 처해 있었던 환경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 누가, 언제, 왜, 어떤 제약 조건 아래서, 어떤 방법으로 만들었는지 살피지 않는 사람에게, 도시는 그저 자신을 보여줄 뿐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지는 않는다.
도시는 대형서점과 비슷하다. 무작정 들어가도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책이 너무 많아서 여기저기 둘러보다 보면 시간이 걸리고 몸도 힘들며, 적당한 책을 찾지 못할 위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구매할 책을 미리 정하고 가서 그것만 달랑 사고 돌아온다면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인터넷서점에 주문하면 되지 무엇 하러 굳이 서점까지 간단 말인가.
대형서점의 가장 큰 장점은 ‘뜻밖의 발견’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즐거움을 맛보려면 서점의 구조를 미리 파악하고, 어떤 분야의 책을 살펴볼지 계획을 세워야 한다. 사려고 마음먹었던 책이 신간 안내나 서평에서 본 것처럼 정말 괜찮은지 확인하는 건 기본이고, 신간 코너와 베스트셀러 진열대, 스테디셀러 판매대, 기획 도서 진열대, 귀퉁이 서가까지 다니면서 이 책 저 책 들춰보는 여유를 누리는 것은 덤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낯선 도시를 여행했다. 찍어둔 곳을 빠뜨리지 않았고 몰랐던 공간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맛보았다.
<아테네>

마지막 밤, 불 밝힌 파르테논과 리카비토스 언덕 꼭대기가 보이는 식당에서 아테네를 생각했다. 철학과 과학과 민주주의가 탄생한 고대 도시, 1천500년 망각의 세월을 건너 국민국가 그리스의 수도로 부활한 아테네는 비록 기운이 떨어지고 색은 바랬지만 내면의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남부러울 것 없었던 어제의 미소년이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은 끝에 주름진 얼굴을 가진 철학자가 되었다고 할까. 그 철학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큰소리로 말하지 않고 오래된 양복에 가려진 기품을 알아볼 책임을 온전히 여행자에게 맡겨두고 있었다.


<로마>
로마는 전성기를 다 보내고 은퇴한 사업가를 닮았다. 대단히 현명하거나 학식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뛰어난 수완으로 돈과 명성을 얻었고, 나름 인생의 맛과 멋도 알았던 그는 빛바랜 명품 정장을 입고 다닌다. 누구 앞에서든 비굴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돈지갑이 얄팍해도 기죽지 않는다. 인생은 덧없이 짧으며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때 거두었던 세속적 성공에 대한 긍지를 버리지는 않는다. 로마는 그런 도시인 것 같았다.

“어때? 종종 만나서 놀면 괜찮지 않겠어?” 로마가 물었다. 테르미니역 승강장에서 공항 가는 기차에 오르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 가끔 만나는 건 뭐, 나쁠 것 없겠지. 다음에 보자. 바쁜 일 좀 끝나면. 차오(Ciao, 안녕)!”

<이스탄불>
역사가 무려 2천700년이나 되는 이스탄불의 최초 이름은 비잔티움(Byzantium)이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 영어로는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이 바뀐 4세기부터 15세기까지는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수도였으며, 그 다음 500년은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이었다.

오랜 세월 경제적·문화적 번영을 누렸던 이 도시는 20세기에 터키공화국의 영토가 된 후 국제도시의 면모를 거의 다 잃고 말았다. 고대 그리스, 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의 역사와 문화는 실종되었고, 그때 만든 몇몇 건축물만 박제당한 공룡처럼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 터키식 커피 전문 카페의 옥호에는 무대 뒤의 빈 곳을 가리키는 터키말이 들어 있었는데, 굳이 번역하자면 ‘커피 대기실’쯤 될 것이다. 잔에 가라앉은 커피 분말을 보며 터키공화국과 이스탄불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그래, 서울 지하철 역삼역 근처에 있는 문화원 이름이 왜 터키문화원이 아니라 이스탄불문화원인지 알겠어.’ 이스탄불은 확실히 터키공화국보다 큰 도시였다. 비잔틴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유산 가운데 터키 민족주의가 포용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터키식 커피’로 이름이 바뀐 ‘오스만식 커피’ 잔 바닥의 분말처럼 가라앉고 말았다. ‘자신의 궁전에 유배당한 왕’을 보면 이런 느낌이 들까? 마지막 일정을 마친 밤, 잠들기 전에 이스탄불에게 위로를 보냈다.
절망하진 마, 이스탄불. 물기를 머금은 잔 바닥의 커피 분말에서 오스만제국의 향기를 맡는 여행자도 있어. 다음에 오면 생강가루를 섞은 커피를 청할게. 후미진 골목 구석에 조용히 엎드려 있는 그리스정교 교회와 아르메니아정교 교회에도 들어가 보고, 파묵 하우스도 가고 말 거야. 귀츨뤼 올(Güçlü ol, 힘내요), 이스탄불!
<파리>
지금 시점에서 어떤 도시를 지구촌의 문화수도로 정한다면 어디가 좋을까? 나더러 결정하라면 망설임 없이 파리를 선택하겠다. 왜? 파리는 에펠탑이 랜드 마크 1번 건축물이니까.

파리 면적은 서울특별시의 1/6 정도이고 인구는 2019년 기준 214만 명이다. 행정 구역은 20개로 분할되어 있는데, 노트르담 대성당과 루브르 박물관이 있는 1구역이 도시의 중앙이다. 센강이 도시 한가운데를 북서쪽으로 흐르다가 에펠탑 근처에서 남서 방향으로 꺾어지기 때문에 파리 도심은 강북과 강남이 아니라 우안과 좌안으로 나눈다. 우안에는 정부청사와 오피스타운, 백화점, 기차역이 있고 좌안에는 대학과 연구 기관이 많다.
2019년 4월, 노트르담의 첨탑과 지붕이 불에 타 무너졌다. 불과 며칠 만에 우리나라 돈으로 1조 원이 넘는 복구 성금이 모였다는 뉴스는 이런 의문을 일으켰다. ‘노트르담이 도대체 뭐기에?’


루브르는 들어가도 후회, 들어가지 않아도 후회하게 된다. ‘오버 투어리즘’은 베네치아나 만리장성에서 생긴 현상이 아니다.

개선문은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을 생각해보기에 적절한 곳이다. 나폴레옹은 여러 면에서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와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

베르사유 궁전은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집일 것이다. 유럽의 왕과 귀족들은 저마다 베르사유를 본뜬 짝퉁 궁전을 지었으며, 부르봉 왕가의 의상을 흉내 내고 프랑스말을 배웠다.
몽마르트르는 소위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경제 지리학적 현상의 발상지일지도 모른다.
1900년 프랑스 타이어 회사 미슐랭이 발간한 맛집 비평지 〈미슐랭 가이드〉도 프랑스의 ‘입맛 제국주의’에 강력한 힘을 실어주었다. 맛집을 알려주면 자동차를 몰고 찾아가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러면 타이어 수요가 늘어난다는 게 미슐랭 경영진의 계산이었다.
‘내가 아무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개의치 않고 자기 색깔대로 씩씩하게 잘 살아갈 친구인데 슬퍼할 게 무에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저 스치듯 가벼운 인사만 남기고 인류 문명의 최전선인 파리를 떠나왔다. ‘아비엥또(à bientôt, 또 봐)!’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서노트] 불편한 편의점2 #편의점 #소설 #김호연 (1) | 2023.01.30 |
---|---|
[독서노트]가진 돈은 몽땅 써라 #독서노트 #일본 (0) | 2023.01.30 |
[독서노트]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김혜남 #정신과 (0) | 2023.01.30 |
[독서노트]데일리 크리에이티브 #책읽기 #자기계발 (1) | 2023.01.30 |
[독서노트] 우리는 어디서 살아야 하는가 / 김시덕 (0) | 2023.01.30 |